ISSCC 논문 심사위원(TPC) 활동기

– 이 글은 2014년 10월 20일 이글루스 블로그에 올렸던 글인데 서비스 종료로 옮겨 온 글입니다.

 

한 동안 개인적인 일로 바빠서 블로그를 내버려 두었는데, 저를 바쁘게 했던 일 중에 하나는 이번 글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작년 부터 ISSCC (International Solid-State Circuits Conference)라는 학회의 TPC(Technical Program Committee) 회원 중의 한명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작년은 첫해라 이것 저것 닥치는 일을 하기에 바빴고, 둘째해가 되니 어떻게 학회가 돌아가는지 분위기도 파악되고 저도 나름대로 여유를 가지게 되어 이렇게 활동기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ISSCC 논문 심사위원(TPC) 활동기

ISSCC 학회 로고

 

먼저 제가 활동하고 있는 ISSCC라는 학회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를 해야할 것 같습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국제 고체 회로 학회’ 인데 학회의 이름 그대로 고체로 분류될 수 있는 결정질(crystalline), 다경절질(polycrystalline), 비결정질(amorphous) 물질로 만들어진 회로들을 다루는 학회입니다. 간단하게는 칩 설계자들의 학회라고 할 수 있는데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실리콘 반도체 칩 말고도 비결정질의 TFT 디스플레이 회로나 플라스틱 필름 위에 인쇄된 회로, 실리콘 이외의 재료(GaN, GaAs, IGZO 등)로 만들어진 회로들도 함께 다루고 있기 때문에 굳이 고체 회로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칩 설계자들에게는 가장 권위있는 학회로 매년 600편 내외의 논문이 제출되어 200편 정도가 채택되고, 학회에는 5천명 내외의 사람들이 참석합니다. 인텔의 새로운 펜티엄 프로세서들, 소니 플레이 스테이션 3에 들어갔던 Cell Processor 등이 ISSCC를 통해 세계 최초로 공개 되었고 삼성의 Exynos 프로세서들 중의 일부도 ISSCC를 통해 처음으로 공개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칩들은 잘 알려진 CPU나 스마트폰 용 SoC들이지만 아무래도 회로 설계 학회이기 때문에 디지털보다 아날로그 회로 설계자들이 더 많이 참석 한다는 점도 특징입니다. 또 한가지 특징으로는 개최 장소가 항상 샌프란시스코 매리엇 호텔로 고정되어 있다는 점도 있네요. (WWDC나 구글 I/O가 열리는 Moscone Center West 바로 옆에 있는 호텔입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학회 홈페이지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www.isscc.org)

학회를 운영하는 회원들은 크게 Executive Committee 회원과 Technical Program Committee (TPC) 회원으로 나뉘는데, Executive Committee 회원들은 학회의 재정, 학회 논문집 출판 및 보도 자료 작성, 연사 섭외 등 학회의 집적적인 운영과 관련된 일을 하고 TPC 회원은 제출된 논문들을 심사하여 어떤 논문을 발표할지 정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TPC 회원 중의 일부는 학회 때 각자 자기와 연관된 논문 발표session의 사회자 역할을 하기도 하고 tutorial 강연을 하기도 합니다. TPC 회원의 임기는 3~5년 정도이며 ISSCC에서 훌륭한 논문을 발표했던 저자를 초대하거나 기존 TPC 회원들의 추천을 받아 새로운 회원을 선정합니다.

 

ISSCC 논문 심사위원(TPC) 활동기

TPC 미팅이 열리는 The Westin San Francisco Airport 호텔

 

TPC 회원들의 가장 큰 임무는 학회에서 발표될 논문을 선정하는 일인데 이번 글은 논문을 선정하기 위한 TPC 미팅에 참여했던 경험에 대한 글입니다. ISSCC에서는 매년 9월 초에 논문을 제출받아 10월 중순 쯤에 합격된 논문들을 발표하는데 이 때문에 10월 중순 전 한달간은 TPC 회원들에겐 가장 바쁜 한달 입니다. 매년 제출되는 600편 정도의 논문중에 자기의 전문 분야와 관련된 논문만 심사한다고 하더라도 대략 한 달 정도의 기간내에 50~70편 정도의 논문을 읽고 합격시킬 논문들을 머리속으로 정해둬야 하기 때문이지요.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거나 국가 연구소에서 일하는 TPC 회원의 경우에는 본업과 논문심사가 겹치는 일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지만 회사에서 일하는 TPC 회원의 경우 퇴근후와 주말 시간을 쪼개어서 열심히 논문을 읽어야 합니다. 이렇게 논문을 읽느라 정신없는 한달을 보내고 나면 TPC 미팅을 위해 샌프란시스코 공항 바로 옆에 있는  Westin 호텔로 논문 심사를 위해 모이게 됩니다. (학회 장소와 마찬가지로 TPC 미팅 장소도 매년 고정입니다.)

 

ISSCC 논문 심사위원(TPC) 활동기

TPC 미팅의 시작 – 지역 회원별 저녁식사

 

TPC 미팅의 공식 일정은 3일 동안 진행 됩니다. 첫날 지역 회원별 저녁식사로 시작해서 다음 이틀 동안 논문심사와 심사결과 정리 자료 작성 등의 일을 하게 됩니다. TPC 회원 중 일부는 넷째날 오전까지 남아서 보도자료 작성을 진행합니다. ISSCC의 경우 국제 학회이기 때문에 지역별 TPC 회원 구성 비율에 상당히 신경씁니다. 세계를 Far East, North and South America, Europe and Middle East 이렇게 3개 지역으로 나누고 3개 지역의 회원 수 비율이 항상 일정선을 유지하도록 하는데 우리나라, 일본, 대만, 중국, 싱가폴 회원들은 Far East 지역에 속하게 됩니다. TPC회원들의 임기가 평균 4년임을 감안하면 항상 전체 회원들 중의 1/4 정도는 새로 활동을 시작하는 회원이 될 수 밖에 없는데, 첫날 저녁식사는 이들이 기존회원들과 친해지고 TPC 미팅 분위기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행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지역별 미팅이기 때문에 비슷한 문화권의 회원들과 조금 더 편안하게 먼저 친해질 수 있는 점도 장점인 것 같습니다.

 

ISSCC 논문 심사위원(TPC) 활동기

지역 회원별 저녁식사 모임

 

첫날 저녁식사 모임에서는 각자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하기도 하고, 각 국가별 TPC 회원들끼리 어떤 활동을 했나 소개를 하기도 합니다. TPC회원들은 아날로그, 저전력 디지털 회로, 데이터 컨버터, 무선 통신과 같은 식으로 나누어지는 여러개의 기술분과들 중에 하나에 속하게 되는데 각 분과별로 Far East 지역에서 몇 편이 제출 되었고 몇 편 정도 합격될 것으로 예상 된다는 간단한 보고를 하기도 합니다. Far East 지역에 할당되는 TPC 회원수가 Far East 지역에서 합격되는 논문수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기 때문에 Far East 지역의 논문이 보다 많이 채택되도록 노력하자는 얘기는 빠지지 않고 나옵니다. 2년 동안 활동을 하면서 느끼는 점은 아무래도 유럽이나 미국지역에 비해 Far East 회원들의 영어 실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면이 있어서 심사 때 조금은 불리한 면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영어로 알아들을 말은 다 알아듣고 할 말도 다 하긴 하는데, 분위기를 전환시킬 수 있는 농담까지는 능숙하게 못해서 애매한 경우에 분위기를 유리하게 돌리는 능력은 살짝 아쉬운 느낌입니다.

 

ISSCC 논문 심사위원(TPC) 활동기

TPC 아침 식사 미팅

 

간단한 저녁식사가 끝나고 나면 다음날 아침 부터는 빡빡한 일정이 시작됩니다. 둘쨋날 오전 9시 ~ 밤 8시, 셋쨋날 오전 9시 ~ 오후 3시 까지 논문 심사를 하고 셋쨋날 오후 6시 까지는 합격된 논문들에 대한 요약 자료 작성, 합격된 저자에게 합격 통지 e-mail 보내기 등을 합니다. 위의 사진은 논문 심사가 시작되기 직전의 아침 미팅인데 논문이 몇 편 제출되었으며 몇 편을 합격시킬 예정인지, 논문 채점시의 가이드라인 안내 등을 듣고 논문 심사를 위한 채점 도구인 iCliker 사용법을 전달 받습니다. (TPC 회원의 수는 대략 150명 정도가 되며, Executive Committee 회원 까지 합하면 대략 200명 정도가 됩니다.)

 

ISSCC 논문 심사위원(TPC) 활동기

기술 분과별 회의실

 

아침 미팅이 끝나고 나면 기술 분과별로 회의실에 모여서 논문 심사를 시작하게 됩니다. 분과별로 대략 15명 내외의 TPC 회원들로 구성되게 되는데 위의 사진과 같은 회의실에서 컴퓨터를 펼치고 인쇄된 논문들을 쌓아놓고 논문 심사를 시작하게 됩니다. 논문 별로 담당자가 있어서 각 담당자는 다른 TPC 회원들 앞에서 논문의 특징에 대한 요약 설명 및 장/단점에 대한 의견을 말합니다. 담당자가 의견을 말하고 나면 다른 TPC 멤버들이 각자 자기의 의견을 내놓기 시작하는데 이 때 많은 의견들이 오가게 됩니다. 논문만 읽어 보면 훌륭해 보이지만 다른 논문에 비슷한 아이디어가 이미 발표 되었다던가, 논문의 저자는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성능을 비교해서 다른 논문들에 비해 좋다고 주장하지만 어떤 부분을 놓쳐서 공평한 비교가 아니라는 식의 다양한 의견이 오갑니다. 의견 교환이 끝나면 각자 1~5점까지 iCliker로 투표를 해서 점수를 매깁니다. 이러한 과정이 수십편의 논문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진행되고나면 셋쨋날 점심 때 쯤에 제출된 논문들을 점수별로 줄을 세울 수 있습니다.

논문 채택 여부는 거의 이런식으로 매겨진 점수에 의해서 정해지지만 약간의 변수가 있습니다. 하나의 session에 30분 발표 논문을 7개(총 7개)로 할지부터 30분 발표 논문은 5개만 하고 15분 발표 논문을 4개까지 할지(총 9개)를 심사 과정에서 정할 수 있는데, 점수가 합격과 탈락의 경계에 있는 논문들의 경우 다른 논문들과 비슷한 주제로 묶을 수 있을 경우 15분 발표 논문수를 늘려 운 좋게 함께 채택되기도 하고 이미 안정권에 합격된 논문과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을 경우에는 학회 참석자들이 흥미를 잃을 수 있다는 이유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래도 누가 보더라도 잘 쓴 논문은 일찌감치 합격이 결정 됩니다. 가끔 논문 저자들 중에 다른 논문들과의 성능을 비교하면서 불리한 비교자료는 쏙 빼고 유리한 비교자료만 제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TPC 회원들이 상당한 전문가들인데다 정말 열심히 관련 논문들을 찾아보고 모이기 때문에 거의 들통나서 안 좋은 점수를 받게 됩니다. TPC 회원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약간의 괘씸죄 비슷한게 적용되어서 솔직히 결과를 비교했을 때 보다 점수를 더 안좋게 받는 경우가 많은 데 이럴 경우 간발의 차이로 논문이 떨어지기도 합니다.

어쨌든 셋쨋날 오후가 되면 합격 논문이 정해지게 되는데, 이 때부터는 논문 심사결과에 대한 정리 자료를 작성하기 시작합니다. 빠른 시간안에글을 써서 전문 editor에게 검토까지 받아야 해서 TPC회원 입장에서는 논문 심사 때 보다 조금 더 스트레스를 받는 시간이 됩니다. 합격된 논문들을 바탕으로 올해 기술 트렌드에 대한 자료를 작성하고 press kit이라고 해서 뉴스 기사등의 참고 자료로 사용될 자료를 작성합니다. (이렇게 작성된 자료는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학회 때 session 진행을 맡게 된 TPC 회원들은 이 때 부터 논문 저자들에게 합격통지 e-mail을 보내기 시작합니다. 이런 역할을 맡은 사람들을 session chair와 session co-chair라고 하는데 저자들이 학회에서 발표 할 자료에 대해 피드백을 주고 발표 리허설을 진행해야 하는 등 학회 발표 날 까지 많은 일들을 하게 됩니다. 이런 일들을 마치고 나면 저녁시간이 되는데 이 때 부터는 TPC 미팅의 공식 일정은 끝나고 각자의 생업이 바쁜 사람들은 TPC 회의장을 하나 둘 떠나게 됩니다. 시간적인 여유가 되는 회원들은 힘든 일정이 끝난 후의 여유있는 저녁을 즐기기도 하지요. Executive committee 회원들의 경우에는 논문 합격자 중에 누구에게 지원금을 줄지(학생에게만 해당합니다.), 어떤 발표자에게 demonstration을 요청할지 session 순서를 어떻게 정할지 등의 문제를 논의하느라 밤 10시 까지 계속 회의가 이어지게 됩니다.

저 같은 경우는 셋쨋날 저녁에 일정이 끝났지만 비행기 시간이 넷쨋날 점심 때라 하루를 더 머물다 왔는데, 항상 셋쨋날 저녁이 가장 맘 편한 것 같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시내에 잠시들러 아이폰 6를 잠깐 구경하고 간단한 쇼핑을 하고 호텔에서 푹 쉬었습니다. 셋쨋날 쯤 되면 시차도 거의 적응이 되서 잠도 잘 오지요. ^^ 이상으로 ISSCC TPC 활동기를 마치겠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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